이란, AI·밈·유머 앞세운 ‘신개념 여론전’ 전개…정치 무관심층까지 파고든다
전통적 뉴스 넘어 대중문화 코드로 확산…외교 채널도 활용
‘슬롭파간다’ 비판 속 영향력 증대…서구 정치 풍자 전략 역이용
[서울=연합뉴스] 전통적인 외교 채널과 보도 기관의 틀을 벗어나 인공지능(AI)과 인터넷 밈, 유머를 활용한 새로운 형태의 정보전이 국제 사회에서 주목받고 있다. 특히 이란은 이러한 디지털 콘텐츠를 통해 자국에 대한 인식을 재구성하고 서방 국가의 정책을 비판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으며, 정치에 무관심한 대중에게까지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영국 가디언 등 외신 보도에 따르면, 이란을 지지하는 미디어 네트워크들은 지난 2월 이란 전쟁 발발 이후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및 미국 외교 정책을 풍자하는 AI 기반의 영상을 꾸준히 유포해왔다. 이들 콘텐츠는 빠르고 유머러스하며 시각적으로 친숙한 ‘인터넷 콘텐츠’의 외형을 띠며, 전통적인 정부 선전물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레고 랩·80년대 록스타 패러디…수십억 조회수 기록
이러한 선전 캠페인의 대표적인 사례는 레고 블록 형태로 구현된 이란 군 고위 지휘관이 힙합 비트에 맞춰 랩을 쏟아내는 영상이다. 이 영상에서 지휘관은 “뉴스는 안 본다는 미국인들의 메시지로 우리 메일함은 넘쳐나. 너희 언론은 온통 헛소리뿐이라서, 대신 우리 노래를 듣는다고 하더군”이라며 서방 언론에 대한 불신을 조롱한다. 해당 콘텐츠는 온라인에서 수십억 회에 달하는 조회수를 기록하며 전 세계적인 파급력을 보여주고 있다.
외교 채널에서도 이러한 전략은 명백히 드러난다. 최근 이란 남아프리카공화국 대사관이 공개한 이미지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1980년대 록스타를 연상시키는 부풀린 헤어스타일로 키보드를 연주하며 프랑스 가수 데지렐스(Desireless)의 히트곡 ‘Voyage Voyage’를 ‘Blockade'(봉쇄)로 개사해 부르는 패러디 장면이 묘사되었다. 이 게시물은 24시간 만에 4만 5천 개 이상의 ‘좋아요’를 받으며 빠르게 확산되어, 외교 공관이 제작한 밈 형식 콘텐츠로는 이례적인 반응을 보였다.
또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이란 문명을 말살하겠다”는 발언을 한 직후, 해당 대사관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카메라를 의아하게 바라보는 개의 모습을 담은 영상을 게시하며 직접적인 반박 대신 유머로 상황을 비꼬는 기지를 발휘하기도 했다.
‘슬롭파간다’ 논란 속 파급력 증대
이러한 콘텐츠들은 허위 정보와 반유대주의적 내용을 담고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이 때문에 ‘조잡한 선전’을 뜻하는 ‘슬롭파간다(slopaganda)’라는 비난도 받고 있다. ‘슬롭파간다’는 ‘조잡한 콘텐츠’를 의미하는 ‘슬롭(slop)’과 ‘선전’을 뜻하는 ‘프로파간다(propaganda)’의 합성어로, 콘텐츠의 낮은 품질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확산력을 지닌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제작 주체가 이란 정부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이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상 자체는 전통적인 국가 선전물처럼 보이지 않아 대중에게 쉽게 다가간다는 평가다.
이 전략의 핵심은 뉴스를 적극적으로 탐색하는 층이 아닌, 정치적 사안에 비교적 무관심한 일반 대중을 겨냥한다는 점이다. 이들 콘텐츠는 밈, 음악, 대중문화 코드로 무장한 ‘트로이 목마’처럼 기능하며, 시청자는 웃음을 소비하는 과정에서 미국의 개입주의나 특정 정치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수용하게 된다. 미국 허위정보 전문가 에머슨 브루킹은 이러한 콘텐츠가 “전쟁이나 정치에 무관심했던 이들까지 끌어들인다”고 분석하며 그 파급력을 강조했다.
서구 문화 코드 역이용…전문가들 “여론 지형에 균열 만들 것”
실제로 지난 20년간 미국 등 서구 사회에서는 풍자와 코미디가 정치적 담론을 형성하는 중요한 도구로 활용되어 왔다. ‘더 데일리 쇼’나 ‘라스트 위크 투나잇’ 같은 프로그램들이 전통적인 뉴스 매체보다 더 신뢰받는 정치 콘텐츠로 소비되는 경향도 나타났다. 존 스튜어트, 스티븐 콜버트, 존 올리버 등 유명 코미디언들은 정치를 재미있고 감정적으로 공감 가능한 방식으로 풀어내며 대중의 정치 인식 형성에 영향을 미쳐왔다. 전문가들은 이란이 바로 이러한 서구 대중문화의 흐름과 특성을 면밀히 파악하고 이를 자국 선전 전략에 역이용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특히 트럼프 전 대통령이 보여준 밈 중심의 정치 전략을 사실상 역으로 활용하는 모습도 관찰된다. 코미디와 퍼포먼스, 소셜 미디어를 결합한 접근 방식이 정치에 무관심했던 유권자층까지 끌어들였던 사례를 분석해 적용한 것이다. 미국의 선전 연구자 낸시 스노는 “이란이 세계적인 대중문화 강국인 미국에 맞서 동일한 문화 도구를 활용하고 있다”고 평가하며, 레고풍 그래픽, 랩 비트, 복고풍 팝 요소 등이 서구 온라인 환경에서 검증된 확산 코드임을 지적했다.
주목할 점은 이란 내부에서는 정부 주도의 강력한 인터넷 통제로 온라인 활동이 엄격히 제한되는 반면, 외부 소셜 미디어 공간에서는 이처럼 적극적이고 자유로운 방식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는 이중적인 양상이다.
전문가들은 이러한 디지털 공세가 단기적으로 국가 이미지를 극적으로 변화시키기는 어렵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전 세계 여론 지형에 미묘하지만 지속적인 균열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분석한다. 특히 정치적 무관심층이 뉴스가 아닌 소셜 미디어 피드의 ‘재미있는 영상’을 통해 국제 정세를 인식하게 된다는 점에서, 이들의 사고방식에 미칠 영향은 상당할 것으로 예측된다.
이러한 흐름은 알리 하메네이 전 이란 최고지도자가 2024년 한 회의에서 “미디어는 미사일, 비행기, 드론보다 훨씬 효과적인 수단이며, 모든 전쟁은 미디어 전쟁”이라고 강조했던 발언의 현실적인 구현으로 볼 수 있다. 물리적 무기가 아닌 문화적 코드를 통해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려는 이란의 시도는 현대 정보전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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